추신수보다 1살 많은데 KIA 감독이라니…이범호 파격선택, 그런데 파격이 아니다?
가히 파격적인 선택이라 할만하다. KBO 리그 현역 최고령 선수인 추신수(42·SSG 랜더스), 김강민(42·한화 이글스), 오승환(42·삼성 라이온즈)보다 1살 밖에 많지 않은데 사령탑의 자리에 앉았으니 말이다.
마침내 KIA 타이거즈가 결단을 내렸다. KIA는 13일 "KIA 타이거즈의 제 11대 감독으로 이범호 1군 타격코치를 선임했다"라고 공식 발표했다.
이범호 KIA 신임 감독은 1981년생으로 KBO 리그 현역 최고령 선수인 추신수, 김강민, 오승환보다 '1살 형'이다. KBO 리그에서 1980년대생이 정식 감독으로 임명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이범호 감독이 현역에서 은퇴한 시점은 지난 2019년. 지금으로부터 5년도 지나지 않았다. 아직 40대 초반의 나이임에도 KIA는 이범호 감독을 선임했다. 이날 KIA는 "이범호 감독과의 계약 기간은 2년이며, 계약금 3억원, 연봉 3억원 등 총 9억원에 계약했다"라고 밝혔다.
국가대표 스타 플레이어 출신인 이범호 감독은 2000년 한화 이글스에서 프로 무대에 데뷔해 2019년 KIA에서 현역 생활을 마치기까지 통산 2001경기에 출전했고 타율 .271(6370타수 1727안타) 329홈런 1127타점 49도루 954득점을 기록한 레전드 선수였다. 무엇보다 개인 통산 만루홈런이 무려 17개로 지금도 이 부문에서 역대 1위를 사수하고 있다.
이범호 감독이 하루 아침에 스타 반열에 오른 것은 아니다. 프로 데뷔 첫 시즌이던 2000년 69경기에 나와 타율 .162(74타수 12안타) 1홈런 3타점 1도루에 그쳤던 이범호 감독은 2001년에도 71경기에서 타율 .196(138타수 27안타) 3홈런 16타점 2도루로 1할대 타율을 벗어나지 못했다. 이어 이범호 감독은 2002년에는 111경기에서 타율 .260(296타수 77안타) 11홈런 35타점 5도루로 생애 첫 두 자릿수 홈런을 마크했으나 2003년 107경기에서 타율 .238(323타수 77안타) 11홈런 38타점 2도루로 크게 나아진 모습을 보여주지는 못했다.
이범호 감독은 2004년 유격수로 변신했고 133경기에서 타율 .308(481타수 148안타) 23홈런 74타점 6도루를 기록하며 비로소 주전 한 자리를 차지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익숙한 3루수가 아닌 유격수로 나선 탓인지 실책을 30개나 저지르는 아쉬움도 있었다.
이범호 감독은 다시 3루수로 돌아갔고 2005년 126경기에서 타율 .273(444타수 121안타) 26홈런 68타점 6도루를 기록하는 한편 실책도 15개로 전년보다 절반이 줄어든 모습을 보였다. 2006년에는 126경기에 나와 타율 .257(421타수 108안타) 20홈런 73타점을 올리면서 한화의 한국시리즈 진출을 이끌었던 이범호 감독은 2년 연속 3루수 부문 골든글러브를 수상하면서 리그 정상급 3루수로 발돋움했다. 이어 이범호 감독은 2007년 126경기에서 타율 .246(418타수 103안타) 21홈런 63타점 2도루, 2008년 125경기에서 타율 .276(434타수 120안타) 19홈런 77타점 12도루를 기록하면서 꾸준히 한화의 핫 코너를 지켰다.
이범호 감독이 국가대표로 가장 빛났던 순간은 역시 2009년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이었다. 당시 한국은 결승까지 진출하는 파란을 일으켰고 그 중심에는 이범호 감독이 있었다. 이범호 감독은 대회 기간 동안 타율 .400(20타수 8안타) 3홈런 7타점을 폭발했고 일본과의 결승전에서도 9회말 2사 1,2루 찬스에서 동점타를 터뜨리는 극적인 장면을 연출하기도 했다. 이범호 감독의 활약은 정규시즌에서도 이어졌고 그해 126경기에 나와 타율 .284(436타수 124안타) 25홈런 79타점 3도루라는 걸출한 성적을 남겼다.
WBC에서의 맹활약은 이범호 감독이 일본프로야구로 진출할 수 있는 교두보가 됐다. 2010년 소프트뱅크 호크스에서 뛰었던 이범호 감독은 48경기에서 타율 .226(124타수 28안타) 4홈런 8타점을 남긴 것이 전부였고 2011년 KIA 유니폼을 입으면서 국내 무대로 복귀했다. KIA와의 인연도 이때부터 시작이었다.
KIA에서의 첫 시즌이었던 2011년 101경기에 나와 타율 .302(318타수 96안타) 17홈런 77타점 2도루를 남긴 이범호 감독은 2012년 햄스트링 부상 여파로 42경기에서 타율 .293(140타수 41안타) 2홈런 19타점 1도루를 남기는데 그쳤다. 2013년 122경기 타율 .248(436타수 108안타) 24홈런 73타점, 2014년 105경기 타율 .269(350타수 94안타) 19홈런 82타점 2도루를 기록한 이범호 감독은 2015년 138경기에 나와 타율 .270(437타수 118안타) 28홈런 79타점 3도루로 맹타를 휘둘렀고 2016년에는 138경기에 출전, 타율 .310(484타수 150안타) 33홈런 108타점 1도루로 커리어 하이 시즌을 치르면서 KIA 타선을 이끌었다.
KIA는 2017년 막강 타선을 앞세워 통합 우승을 해냈고 이범호 감독은 115경기에서 타율 .272(382타수 104안타) 25홈런 89타점으로 활약하는 한편 한국시리즈 5차전에서 결정적인 만루홈런을 폭발하면서 생애 첫 한국시리즈 우승의 순간을 만끽했다. 이어 2018년에는 101경기 타율 .280(332타수 93안타) 20홈런 69타점으로 활약을 이어갔지만 2019년 19경기 타율 .231(26타수 6안타) 1홈런 5타점을 남겼고 그해 7월 13일 광주 한화전에서 은퇴 경기를 치르며 선수로서 팬들과 작별을 고했다.
이범호 감독은 선수 생활을 마감한 뒤에도 일본프로야구 소프트뱅크와 메이저리그 필라델피아 필리스에서 코치 연수를 받으면서 지도자의 길에 접어들 준비를 마쳤고 2020년 KIA에서 스카우트직을 맡은데 이어 2021년 퓨처스 총괄코치, 2022년부터 지난 해까지 1군 타격코치를 맡아 지도자로서 시야를 넓혔다.
겉으로 보기엔 KIA가 1981년생인 이범호 감독을 선임한 것이 파격적인 선택처럼 보이지만 어쩌면 가장 안정을 추구한 선택이라 할 수 있다.
KIA는 스프링캠프 시작을 앞두고 그야말로 날벼락을 맞았다. 검찰이 장정석 전 KIA 단장을 수사하는 과정에서 KIA 구단을 후원하는 한 커피 업체로부터 김종국 전 KIA 감독이 1억원대, 장정석 전 단장이 수천만원대 금품을 받은 혐의를 포착한 것. 결국 KIA는 지난달 29일 "김종국 감독과의 계약을 해지했다. 검찰 수사 결과와 상관없이 '품위손상행위'로 판단해 김종국 감독과의 계약해지 결정을 내렸다"라고 밝히면서 김종국 전 감독과 결별을 선언했다.
지난 해 포스트시즌 진출에 실패하고도 김종국 감독 체제를 신임했던 KIA로서는 '뒤통수'를 맞은 것 같은 충격이었다. 그것도 김종국 전 감독이 '타이거즈 원클럽맨' 출신이라는 점에서 KIA 구단 내에서도 충격이 클 수밖에 없었다.
무엇보다 당장 스프링캠프를 치러야 하는 선수단의 출국이 코앞으로 다가온 상황에서 이를 총괄하는 사령탑의 부재는 분명 치명적인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또한 갑작스럽게 사령탑의 공백이 생기면서 선수단이 동요할 수도 있는 분위기였다. KIA는 하루 빨리 난파선을 구할 새로운 선장을 임명해야 하는 절대 과제를 품에 안으면서도 지난달 30일 선수단이 스프링캠프 출국길에 올랐다. '임시방편'으로 새 감독을 임명하기 전까지 진갑용 수석코치 체제로 운영하겠다는 계획이었다.
KIA는 내부 사정을 잘 알고 '분위기 수습'이 가능한 인물을 새 사령탑으로 선임하려 했다. 그리고 이범호 감독이 적임자라는 판단을 내렸다. 사실 타 구단에서도 KIA가 이범호 감독을 선임한 것을 두고 "예상 가능했던 일"이라고 할 정도로 이범호 감독은 KIA의 내부 사정을 잘 알고 분위기도 수습할 수 있는 적임자라는 평가를 받았다. 나이만 1981년생으로 어릴 뿐이지 "준비된 감독감"이라는 평가도 있었다.
KIA 구단은 "이범호 감독이 팀내 퓨처스 감독 및 1군 타격코치를 경험하는 등 팀에 대한 전반적인 이해도가 높다"라면서 "선수단을 아우를 수 있는 리더십과 탁월한 소통 능력으로 지금의 팀 분위기를 빠르게 추스를 수 있는 최적임자로 판단해 선임하게 됐다"고 이범호 감독을 선임한 배경을 전했다.
만약 KIA가 외부 인사를 영입했다면 한창 스프링캠프를 진행하고 있는 선수단을 파악하는데 많은 시간이 소요될 수밖에 없었고 선수단 분위기를 추스를 수 있을지도 의문이었다. 과거 OB 베어스(현 두산 베어스)가 1994년 선수단 집단 항명 사건으로 윤동균 감독이 물러나면서 OB와 접점이 없었던 김인식 감독을 새로 선임하고 1995년 한국시리즈 우승을 차지한 사례가 있지만 OB가 김인식 감독을 선임한 시기는 1994년 9월이었다는 점에서 지금 KIA의 상황과는 차이가 있다. 김인식 감독이 1995시즌이 개막하기 전까지 선수단을 파악하고 분위기를 추스를 수 있는 시간은 충분했다는 의미다.
게다가 당시만 해도 김인식 감독은 해태 타이거즈(현 KIA 타이거즈)에서 오랜 기간 수석코치를 지내고 쌍방울 레이더스의 초대 감독을 맡아 지도자로서 풍부한 경험을 쌓은 인물이었지만 이범호 감독은 초보 감독이라는 점에서 상황이 다르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일까. 아무래도 이범호 감독의 각오도 남다를 수밖에 없다. "팀이 어려운 상황에서 갑작스럽게 감독 자리를 맡아 걱정도 되지만 무거운 책임감을 가지고 차근차근 팀을 꾸려 나가도록 하겠다"는 이범호 감독은 "선수들과 격의 없이 소통하면서, 그라운드에서 마음껏 자신들의 야구를 펼칠 수 있는 무대를 만들어주는 지도자가 되겠다"고 밝혔다. 이어 그는 "구단과 팬이 나에게 기대하는 부분을 잘 알고 있다. 초보 감독이 아닌 KIA 타이거즈 감독으로서 맡겨 진 임기 내 반드시 팀을 정상권으로 올려놓겠다"는 포부를 전하기도 했다.
현재 KIA는 호주 캔버라에서 스프링캠프를 진행하고 있다. 이범호 감독은 KIA의 새 사령탑으로 선임된 첫 날부터 선수단과 상견례를 나누면서 바쁜 나날을 보냈다.
이범호 감독의 자신감은 KIA 공식 유튜브 채널과의 인터뷰에서도 고스란히 드러난다. "내가 선수와 코치 생활을 할 때부터 굉장히 오랜 시간 동안 선수들과 호흡을 맞췄기 때문에 그 선수들의 손가락부터 발가락까지 어디에 어떤 모습인지 다 체크하고 있다"라고 선수단 전체를 이미 파악하고 있음을 말한 이범호 감독은 "우리 선수들이 그라운드에 나가서 즐겁게 웃으면서 야구할 수 있는 상황을 만들고 싶은 것이 내가 추구하는 야구"라면서 "선수들이 가진 플레이를 하나도 빠짐 없이 그라운드에서 다 보여줄 수 있고 거기에서 실패를 하더라도 많은 것을 느꼈으면 한다. 자기가 가진 실력을 마음껏 펼칠 수 있으면 좋겠다"며 자신이 추구하는 방향성을 설명하기도 했다.
이어 그는 "누구나 감독으로서 최고의 목표는 우승이라고 생각한다. 지금 선수들이 우승할 수 있는 최적의 멤버라고 생각한다. 지금 시기에 우승을 맛봐야 뒤로 갈수록 KIA 타이거즈라는 팀 자체가 더 강해질 것이라 생각한다. 올해 어떻게든 기필코 한국시리즈에 진출해서 팀이 우승할 수 있도록 하겠다. 나 뿐 아니라 선수들도 그런 생각을 갖고 있을 것"이라면서 초보 감독이지만 정상 도전에 나설 것이라는 포부도 잊지 않았다.
KIA는 스프링캠프 시작 후 2주 가까운 시간이 지난 뒤에야 새 감독 선임을 완료했다. 지난 해 나성범, 최형우, 박찬호, 최원준 등 크고 작은 부상에 시달리면서 '부상병동'이라는 표현이 딱 들어 맞았던 KIA는 정규시즌을 6위로 마치는데 만족해야 했다. 5위 두산에 겨우 1경기차로 뒤져 포스트시즌 진출이 좌절된 것이다. 주위에서는 올해 KIA가 성과를 내야 하는 시기라고 입을 모은다. 마침 올해 정상급 전력을 갖췄다는 평가를 받는 KIA가 감독 교체라는 변수를 딛고 호랑이 군단의 날개를 펼 수 있을까. 이제 주사위는 던져졌다.